해병대 실무에 처음 발을 들인 신병과 전역까지 일주일 남은 말년 병장의 군 생활 목표는 다르지 않다. 자격증 취득부터 운동까지 다양하게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은 목표는 '무사히 전역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되면 누구나 하는 게 전역이기 때문에 무난하고 쉬운 거 같다. 하지만 '무사 전역'과 '전역'은 엄연히 다른 말이다. 이병이고 병장이고 내 남은 군 생활 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 아는 해병이 얼마나 될까. 휴가 중에 코로나에 확진돼 3개월 뒤 복귀한 해병이나, 전역을 일주일 앞두고 차량 접촉 사고를 낸 해병이나, 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의가사한 해병 중 내가 이렇게 되리라고 알고 있었던 해병이 누가 있었을까? 그 누구도 내 군 생활이 끝나기까지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래서 무사 전역이 어려운 거기도 하지만, 조금 다른 이유로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후임 A 이야기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어느 날, 후임 A가 선임 두 명과 함께 들어왔다. 세 명이서 하는 대화는 언뜻 보기에도 좋은 얘기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대화를 마치고 A의 안색이 안 좋았던 게 마음에 걸려서 이후 따로 불러내 대화해 보기로 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도와줄 테니 얘기해도 된다고, 도서관에서 선임들이 무슨 말을 한 거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A는 대답을 잘 못하더니 이내 눈물을 흘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결국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얘기를 안 해줘서 다음에도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하기로 하고 끝이 났다. (나중에 다른 후임에게 전해 듣기로는 인계사항을 깜박하고 안 지켜서 혼난 거라고 했다.)
후임 A가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내고 이곳에서 무사히 전역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다. 생활반에 들어온 신병에게 말을 험하게 했는데, 신고가 되어서 다른 대대로 분리 파견되었다. A가 분리 파견되기 전에 도서관에서 혼냈던 선임에게 멱살도 잡히고 폭언도 들었다던데.. 내가 그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지금도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지 않았을까? 아직도 후임이 분리 파견되기 전 마지막으로 안아달라면서 벌게진 눈으로 내게 미안하다고, 그동안 감사했다고 했던 그 음성이 잊히지 않는다. 잘못한 거에 따른 처벌은 당연히 받아야겠지만 일찍 바로잡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후임 B 이야기
이번에도 비슷하지만 다른 경우이다. 과업 시간에 부서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데, 선임이 후임 B의 팔을 잡고 때리는 걸 목격했다. 후임은 웃어 보였지만 내가 보기엔 그건 절대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후임에게 공구를 알려주겠다고 하고 밖으로 불러내서 솔직하게 얘기했다. 방금은 심했던 거 같다고, 여기 좀 있다가 들어가자고 했다. 후임은 알겠다고 하고 고개를 떨구더니 서럽게 울었다. 마음이 참 먹먹했다. 여태껏 후임 혼자 마음고생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멀리서 지나가던 간부가 우연히 목격하였고, 사건화되어 폭행한 선임은 분리 파견되었다. 알고 보니 분리 파견된 선임은 예전부터 후임을 자주 꼬집거나 때리고 괴롭혔던 것으로 밝혀졌다.
두 해병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일까? 둘 다 힘든 시절을 보내고 선임이 되었다는 게 공통점이고, 차이점은 한 명은 좋은 선임으로 다른 한 명은 분리 파견된 선임으로 기억된다는 거다. A는 선임이 되어서 자신이 당했던 그대로 후임을 괴롭혔고, B는 후임들과 마찰 없이 친하게 잘 지냈다. 많은 사람들이 보상심리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었고 당했으니까 남들도 똑같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 좋은 게 있다면 그건 내 차례에서 끊는 게 맞다. 무조건적인 흑백논리로서 말하는 건 아니나, 좋은 건 남기고 나쁜 건 없애야 한다. 어쩌면 다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군대라는 조직 문화가 그러지 못하게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군 생활은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니기에, 서로 돕고 지키며 모든 사람들이 사고 없이 무사 전역할 수 있길 바란다.
당신이 살았음으로 인해 하나의 생명이라도 숨쉬기 더 쉬웠음을 아는 것.
이것이 성공했다는 것이다.
배시 앤더슨 스탠리 '성공한다는 것' 중에서
해병대가 예전보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훈련은 여전히 힘들고, 인원이 부족하니 근무는 빠듯하고, 휴가도 굉장히 박한 데다가 시설도 좋은 편이 아니다. 지금 가고자 하는 그곳의 병영문화가 어떨지 전역한 나조차도 모른다. 그래도 해병대에 가고 싶은가? 그래도 꼭 해병대를 가야겠다면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대학교 복학 일자를 맞추는 것이든, 내가 너무 편하게 살아서 정신을 차리고 싶은 것이든, 신앙 불모지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고 싶은 것이든 병영문화를 혁신해 보고 싶은 것이든 뭐든 좋다. 단지 1년 6개월 동안 내 몸과 정신이 고생하는 데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면 한다.